재홍콩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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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홍콩 일본인은 홍콩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지칭한다. 19세기 말 쇄국 정책이 폐지되면서 일본인들의 홍콩 이주가 시작되었고, 무역상과 가라유키상(해외 원정 매춘부)들이 정착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홍콩 내 반일 감정이 고조되어 소요 사태가 발생했고, 일본군 점령 기간 동안 일본인 인구가 급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경제 부흥과 함께 일본인 인구가 증가했으며, 1997년 홍콩 반환 이후에는 경제적 통합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 추세를 보였다. 현재는 홍콩 일본인 학교, 일본인 클럽 등이 운영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의 이민 양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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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홍콩 일본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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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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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27,429명 (2015년) (홍콩 인구의 0.3%) |
거주지 | 타이쿠싱, 훙홈 |
언어 | 일본어: 77.4% 영어: 17.2% 광둥어: 3.9% 표준 중국어: 1.0% |
종교 | 기독교 불교 천리교 신토 무종교 |
관련 민족 | 중국에 있는 일본인 |
일본-홍콩 관계 | |
관계 | 일본-홍콩 관계 |
기타 정보 | |
국적 | 일본 |
2. 역사
도쿠가와 막부 말기 쇄국정책이 철폐되면서 일본인의 홍콩 이주가 시작되었다.[45][7] 일본과 홍콩, 상하이를 잇는 정기 운항편이 개시되면서, 일본인 무역상과 가라유키상(해외 원정 매춘부)들이 홍콩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45] 1880년 당시 홍콩에 거주하는 일본 국적자는 남성 26명, 여성 60명이었지만, 메이지 시대 말기인 1912년에는 총인구수가 200명까지 늘었다.[46][8]
국외 이미지를 높이는 데 주력하던 일본 정부는 이들 이민자의 다수를 차지하던 가라유키상을 문제시하였다.[47][9] 초기 가라유키상들은 나가사키발 석탄수송선에 밀항하여 홍콩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았다.[47] 1885년 미나미 사다쓰케 일본 영사는 일본인의 매춘업 관여를 단속하는 비공식 차원의 협약을 영국 식민당국과 체결하였다.[47] 매춘 허가를 받은 일본인 여성의 수는 52명으로 줄이고, 그밖에 허가 신청을 낸 사람은 관련 기관에 회부하여 본국 송환 준비를 하거나 완자이의 매독 치료 병원에 수용토록 하였다.[47]
이후 가라유키상의 출신지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1902년 노마 세이치 영사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들 여성들이 가장 많이 건너온 항구는 기타큐슈시 모지구라고 밝혔다.[48][10] 관계자들은 항구 부근의 모지코역에서 나오는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모집하였다.[49][11] 하지만 일본 영사관은 이러한 매춘 단속 과정에서 현지 일본인 사회로부터는 별다른 협력을 받지 못했는데, 접객업에 종사하는 일본인 사업가들은 주로 매춘부 손님과 변소 사용료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47][9]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홍콩 현지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50][12] 1931년 9월 20일, 《공상일보》(工商日报)는 만주사변 소식을 전하며 일본을 강력하게 규탄하고, 중국인 독자들에게 "들고 일어나자"고 호소하였다.[50]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9월 23일을 만주 사변에 대한 국치일로 선포하였다.[50][12][41] 같은 날 저녁,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완자이의 존스턴 로드 일대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일본에 반감을 가진 중국 청년들이 일본인 소유의 술집에 돌을 던졌는데, 이 술집은 주로 미국인과 영국인 선원들이 애용하던 곳이었다.[50][13] 다음날에는 케네디 타운의 어느 일본인 학교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불에 태워졌고, 25일까지 일본인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이어졌다.[51][13]
소요 사태의 정점은 일본인 일가족 살해 사건이었다.[52][14] 중추절인 9월 26일, 가우룽싱 부근에 살던 야마시타 일가족 다섯 명이 수백 명의 중국 시위대에게 끌려나와 린치를 당했다.[53][15] 부모는 칼에 찔려 현장에서 사망하고 조모와 두 손주는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망했다.[53][15] 이 사건으로 식민당국은 그날 저녁 군대를 소집, 비상사태를 선포해 다음날까지 유지하였다.[54][16] 이후 일본에 소요 사태 소식, 특히 야마시타 일가족 살해 사건이 뒤늦게 전해졌으며, 일제가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구실로 삼기도 하였다.[55][17]
만주사변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한국 역시 이로 인한 고통을 겪었다. 홍콩에서 발생한 반일 소요 사태는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이 대영제국에 선전포고한 뒤 홍콩 전투를 치루면서, 홍콩의 일본인 인구는 급감하여 80명에 불과하게 되었다.[58][20] 만주사변 이후 세워진 만주국의 경우처럼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에는 일본 민간인들이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본군 점령 기간 동안 홍콩에는 소수의 관료와 공무원들을 제외하면 일본 민간인이 급격히 유입되지는 않았다.[59][21]
기존에 재홍콩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기관들은 일본군이 점거해 군용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홍콩의 일본어 일간지였던 홍콩일보는 일본어판 발행을 중단하였지만 중국어판과 영어판은 발행을 지속하여 상부로부터 공식 승인된 뉴스를 전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58][20] 일본군은 여느 점령지와 마찬가지로 홍콩 사람들에게도 혹독한 통치를 가하였지만,[59] 홍콩에 남은 일본 민간인 중에서는 곤경에 처한 중국인 이웃을 돕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60] 예컨대 훗날 법조인으로 활동하는 패트릭 유(유바오)는 회고록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홍콩을 탈출해 마카오와 광저우 만(당시 각각 포르투갈령과 프랑스령으로 일본군 점령 지역이 아니었음)을 거쳐 중국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학교의 교장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한다.[60][22]
영국의 항복에 따라 홍콩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고, 경제는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 군표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에도 홍콩에서 반일 감정의 불씨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경제가 부흥하면서 일본의 해외 투자가 급증하였고, 홍콩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도 증가하게 되었다.[61] 1960년대에는 홍콩 일본인 학교가 설립되었고[61] 1987년 6월부터는 일본어 주간지인 《홍콩 포스트》 (香港ポスト)가 발행을 개시하였다.[62]
1981년 7,802명에 불과했던 재홍콩 일본인의 숫자는 1999년 23,480명으로 급증하여 런던이나 뉴욕의 일본인 인구와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63] 또 인구 성장과 더불어 일본계 기업의 수도 가파른 상승을 보였는데 1988년 1,088개 기업에서 1994년 2,197개 기업으로 불과 6년 사이에 두 배가 되었다.[63]
1997년 중국의 개혁개방과 홍콩 반환으로 홍콩과 중국 본토 간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다수의 일본 기업들도 그 추세에 발맞춰 국경 너머 선전과 광저우 등지로 사업영역을 이전하기도 했다.[64] 이로 인해 홍콩의 일본인 인구수는 1999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64] 2001년 홍콩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재홍콩 일본인의 인구수는 14,100명으로 이전 인구의 33%가 줄어들었다.[65] 하지만 곧바로 인구수가 반등하기 시작하면서 2004년 일본 영사관 조사에서는 25,6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4] 홍콩에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동구로, 전체 인구의 0.64%인 2,878명이 일본계였다.[66]
2. 1. 기원
도쿠가와 막부 말기 쇄국정책이 철폐되면서 일본인의 홍콩 이주가 시작되었다.[45][7] 일본과 홍콩, 상하이를 잇는 정기 운항편이 개시되면서, 일본인 무역상과 가라유키상(해외 원정 매춘부)들이 홍콩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45] 1880년 당시 홍콩에 거주하는 일본 국적자는 남성 26명, 여성 60명이었지만, 메이지 시대 말기인 1912년에는 총인구수가 200명까지 늘었다.[46][8]국외 이미지를 높이는 데 주력하던 일본 정부는 이들 이민자의 다수를 차지하던 가라유키상을 문제시하였다.[47][9] 초기 가라유키상들은 나가사키발 석탄수송선에 밀항하여 홍콩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았다.[47] 1885년 미나미 사다쓰케 일본 영사는 일본인의 매춘업 관여를 단속하는 비공식 차원의 협약을 영국 식민당국과 체결하였다.[47] 매춘 허가를 받은 일본인 여성의 수는 52명으로 줄이고, 그밖에 허가 신청을 낸 사람은 관련 기관에 회부하여 본국 송환 준비를 하거나 완자이의 매독 치료 병원에 수용토록 하였다.[47]
이후 가라유키상의 출신지는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1902년 노마 세이치 영사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들 여성들이 가장 많이 건너온 항구는 기타큐슈시 모지구라고 밝혔다.[48][10] 관계자들은 항구 부근의 모지코역에서 나오는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모집하였다.[49][11] 하지만 일본 영사관은 이러한 매춘 단속 과정에서 현지 일본인 사회로부터는 별다른 협력을 받지 못했는데, 접객업에 종사하는 일본인 사업가들은 주로 매춘부 손님과 변소 사용료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47][9]
2. 2. 1931년 반일 소요 사태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홍콩 현지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50][12] 1931년 9월 20일, 《공상일보》(工商日报)는 만주사변 소식을 전하며 일본을 강력하게 규탄하고, 중국인 독자들에게 "들고 일어나자"고 호소하였다.[50]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9월 23일을 만주 사변에 대한 국치일로 선포하였다.[50][12][41] 같은 날 저녁,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완자이의 존스턴 로드 일대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일본에 반감을 가진 중국 청년들이 일본인 소유의 술집에 돌을 던졌는데, 이 술집은 주로 미국인과 영국인 선원들이 애용하던 곳이었다.[50][13] 다음날에는 케네디 타운의 어느 일본인 학교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불에 태워졌고, 25일까지 일본인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이어졌다.[51][13]소요 사태의 정점은 일본인 일가족 살해 사건이었다.[52][14] 중추절인 9월 26일, 가우룽싱 부근에 살던 야마시타 일가족 다섯 명이 수백 명의 중국 시위대에게 끌려나와 린치를 당했다.[53][15] 부모는 칼에 찔려 현장에서 사망하고 조모와 두 손주는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망했다.[53][15] 이 사건으로 식민당국은 그날 저녁 군대를 소집, 비상사태를 선포해 다음날까지 유지하였다.[54][16] 이후 일본에 소요 사태 소식, 특히 야마시타 일가족 살해 사건이 뒤늦게 전해졌으며, 일제가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구실로 삼기도 하였다.[55][17]
만주사변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한국 역시 이로 인한 고통을 겪었다. 홍콩에서 발생한 반일 소요 사태는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였다.
2. 3. 일본군의 점령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이 대영제국에 선전포고한 뒤 홍콩 전투를 치루면서, 홍콩의 일본인 인구는 급감하여 80명에 불과하게 되었다.[58][20] 만주사변 이후 세워진 만주국의 경우처럼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에는 일본 민간인들이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본군 점령 기간 동안 홍콩에는 소수의 관료와 공무원들을 제외하면 일본 민간인이 급격히 유입되지는 않았다.[59][21]기존에 재홍콩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기관들은 일본군이 점거해 군용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홍콩의 일본어 일간지였던 홍콩일보는 일본어판 발행을 중단하였지만 중국어판과 영어판은 발행을 지속하여 상부로부터 공식 승인된 뉴스를 전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58][20] 일본군은 여느 점령지와 마찬가지로 홍콩 사람들에게도 혹독한 통치를 가하였지만,[59] 홍콩에 남은 일본 민간인 중에서는 곤경에 처한 중국인 이웃을 돕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60] 예컨대 훗날 법조인으로 활동하는 패트릭 유(유바오)는 회고록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홍콩을 탈출해 마카오와 광저우 만(당시 각각 포르투갈령과 프랑스령으로 일본군 점령 지역이 아니었음)을 거쳐 중국 본토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학교의 교장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한다.[60][22]
영국의 항복에 따라 홍콩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고, 경제는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 군표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에도 홍콩에서 반일 감정의 불씨 중 하나가 되고 있다.
2. 4. 전후 시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경제가 부흥하면서 일본의 해외 투자가 급증하였고, 홍콩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도 증가하게 되었다.[61] 1960년대에는 홍콩 일본인 학교가 설립되었고[61] 1987년 6월부터는 일본어 주간지인 《홍콩 포스트》 (香港ポスト)가 발행을 개시하였다.[62]1981년 7,802명에 불과했던 재홍콩 일본인의 숫자는 1999년 23,480명으로 급증하여 런던이나 뉴욕의 일본인 인구와 맞먹는 수준이 되었다.[63] 또 인구 성장과 더불어 일본계 기업의 수도 가파른 상승을 보였는데 1988년 1,088개 기업에서 1994년 2,197개 기업으로 불과 6년 사이에 두 배가 되었다.[63]
1997년 중국의 개혁개방과 홍콩 반환으로 홍콩과 중국 본토 간의 경제적 통합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다수의 일본 기업들도 그 추세에 발맞춰 국경 너머 선전과 광저우 등지로 사업영역을 이전하기도 했다.[64] 이로 인해 홍콩의 일본인 인구수는 1999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64] 2001년 홍콩통계국 조사에 따르면 재홍콩 일본인의 인구수는 14,100명으로 이전 인구의 33%가 줄어들었다.[65] 하지만 곧바로 인구수가 반등하기 시작하면서 2004년 일본 영사관 조사에서는 25,6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44] 홍콩에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은 동구로, 전체 인구의 0.64%인 2,878명이 일본계였다.[66]


3. 이민의 양상
해외 일본인 동포사회는 "본국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연대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 ... 해외의 일본인 마을"로 설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67] 그러나 2001년 딕슨 웡이 야오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는 이 같은 생각이 홍콩에서 일하는 사무직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67] 1990년대 들어서부터는 일본 독신 여성들이 남성 중심의 일본 국내 직장환경에서 벗어나 홍콩으로 이주해 오는 일종의 '붐'이 일기 시작했다.[68] 이들은 주로 영어권 국가들을 대상 국가로 삼았던 기존 이민자들과는 달리, 홍콩이나 다른 아시아 도시로 가서 경력을 쌓았다.[68] 특히 이 기간에 홍콩으로 건너온 미혼 내지는 이혼한 여성 중 30%가 해외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는 조사 결과가 있다.[68] 독신 여성들이 이민을 원할 뿐만 아니라 홍콩에 주재하는 일본 기업들도 일본 본토의 기업보다 여성들을 더 고용하고 더 많이 승진시킨다는 통계도 있는데, 이는 남성 직원을 고용할 때 자녀 교육비나 그밖의 재외거주민 혜택 등을 수당에 합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68]
일본계 기업의 현지 중국인 직원은 같은 직급이라 하더라도 일본 경영인과 현지 경영인 사이의 영향력 차이를 확실히 감지한다.[69] 홍콩으로 건너오는 일본 여성들은 중국어 (광둥어나 보통화)를 배워 말하겠다는 일념이 있지만 정작 도착한 뒤로는 영어로만 소통해도 충분히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로 말하면 오히려 현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위치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70] 2011년 인구조사에서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인식하는 응답자를 대상으로 사용 언어를 조사한 결과 77.4%가 일본어를 일상 언어로 꼽았고, 17.2%가 영어, 광둥어 3.9%, 보통화 1.0%라는 결과가 나왔다.[71] 일상 언어 외에 추가로 쓰는 언어가 무엇인지를 묻자 64.3%가 영어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였고, 그 뒤로 18.7%가 광둥어와 보통화, 19.5%가 일본어였다 (복수 응답이 허용됐기 때문에 전체 비율을 합산하면 100%를 초과한다).[71] 반대로 일상 언어로도 추가 언어로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조사한 결과 보통화가 81.3%, 광둥어가 77.4%였으며 영어는 18.4%, 일본어는 4.1%였다.[71]
4. 교육
홍콩 내 일본인들을 위한 국제 일본학교인 홍콩 일본인 학교가 있다.[72][73]
홍콩일본인보습수업교 (香港日本人補習授業校, 홍콩 니혼진 호슈주교코)는 홍콩에 거주하는 일본 어린이들을 위한 보충학습 학교이다.[34][35]
일본인 클럽이 운영하는 최초의 일본인 초등학교는 1911년 케네디 로드에 캠퍼스를 열었으나,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 해외 거주자들은 가족을 데려오지 않았고, 한 번에 100명 미만의 일본인 자녀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의 등록 학생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36]
5. 유명인
- 스콧 매캔지 - 다트 선수. 브라질에서 자랐으며 일본계와 스코틀랜드계 혼혈이다. 6살 때 영국으로 이주했다가 1996년부터 홍콩에 거주하였으며 세계 정상급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 찬신이치 - 축구 선수. 일본 도쿄에서 일본인과 홍콩인 혼혈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홍콩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이다.
6. 기타
홍콩 일본인 클럽(香港日本人倶楽部)은 1905년에 설립되었으며, 코즈웨이 베이에 클럽 건물이 있다.[37] 1906년에는 센트럴에 클럽하우스가 문을 열었다.[36] 일본 영사관은 자금과 직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클럽은 홍콩 일본인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었다.[36] 1921년에는 일본인 협회로 알려지게 되었다.[36] 1996년에는 4,228명의 일본인 회원이 있었으며, 2002년에는 비일본인 회원 수를 276명으로 늘렸다.[38] 2002년 기준 일본인의 회원 가입비는 200~400HK$달러, 보증금은 1,000달러였으며, 비일본인의 경우 가입비는 9,500달러였다.[38] 월 회비는 일본인의 경우 150~280달러, 비일본인의 경우 340달러였다.[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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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談だが、襲撃されたパブの殆どが、アメリカやイギリスの船員達を顧客にしていた店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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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인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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